이사하는 날, 짐 옮기는거 구경하다 지루해서 커피 사들고 동네를 한바퀴 그냥 돌았다. 그렇게 목적없이 걷다보니 평소 안보이던게 보였다. 이를테면 꽃집 같은거. 때마침 볕좋은 3월이라 나도 화분을 하나 사서 창가에 두고 싶어졌다. 그래서 커피는 꽃집에 버리고 양손에 화분을 두개 들고왔다. 물 얼마나 자주 줘야 되요 물었을 때, 손으로 흙만져보고 말랐으면 주라는, 꼭 된장 풀고 두부 썰어넣으면 된장찌개 된다는 엄마 말처럼 건성인 답변이 돌아왔다. 이게 한달이나 갈까 싶었다.
우리집 식물들은 오래 못살았다. 이따금 선물받은 화분들이 다 그랬고 아버지가 기습적으로 놓고 간, 왠만해선 안죽는다는 난도 죽었다. 언젠가 여행갔다 돌아와보니 화분마저 없어졌는데 빈 사이 집에 왔던 아버지가 열받아서 도로 들고 가셨다고 한다. 식물도 생명인데 내 손으로 뭔가를 죽였다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래서 안들이는게 답인데 볕좋고 이사했다는 이유로 대책없이 지른 것이다.
그 압박감떄문인지 내가 철이 들어서 그런지 얘들이 한달이 넘도록 싱싱하다. 비록 꽃은 좀 시들었는데 줄기와 이파리들은 거의 나무가 될 기세로 뻗어가고 있다. 얼마나 푸른지 밤에 불을 꺼놓고 창가를 보면 줄기들만 파랗게 빛이 나는 것 같다. (혹시 식물표피에 형광성분이 있나 검색까지 해봤다.) 새로 난 줄기에선 새 봉오리가 돋아나고 며칠 지나면 그래서 또 하얀 꽃들이 자잘자잘 피어났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이제는 화분부터 쳐다보고 흙말랐나 안말랐나 만져보는게 습관이 됐다. 어쩌다 물 주는걸 깜빡하면 여지없이 다음 날 줄기 끝들이 머리를 숙이고 처량하게 늘어져있다. 그러면 난 놀래서 물병에 물을 한가득 채워 화분에 따라줬다. 한 때는 내가 보리차 타서 마시던 병인데 지금은 아예 화분 옆에 상주한다. 난 뭐든 꽂히면 이렇게 열심히 한다.
나에게 있어 화분이란 내 방에서 유일하게 피드백이 되는 가치있는 존재다. 물을 주면 자라고, 거르면 시들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방의 고독함을, 내 삶의 황폐함을 계산할 수 있게 됐다. 화분을 갖기 전과 후를 비교하면 되니까.
사람은 화분 하나만으로도 교감이 되는, 말하자면 하다못해 화분이라도 붙잡고 의지할 정도로 관계에 집착하는 동물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당연히 사람은 고양이가 아니라 개과다. 무리를 따르고 관계가 필요하며 고독이 왔을 때 고독을 알아차리고 슬퍼한다. 심지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극단적 상황을 가정할 때 쉽게 '무인도'를 설정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인간이 혼자 남겨진 상황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소수의 고독'을 읽으면서 극단적인 고독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어릴 때 겪은 흔치 않은 사고. 자아에 대한 부정. 부정이 낳은 환멸. 환멸이 낳은 고립. 고독을 형성하는 물리적 조건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두 가지 케이스가 시범적으로 제시됐다. 그들은 서로가 세상에서 유이하게 고립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걸 알아봤고 당연히 사랑했으나 결코 함께하진 못했다. 그래서 자폐적인 수학도 주인공은 자신들을 쌍둥이 소수에 비유했다.
수학자들은 그들을 ‘쌍둥이 소수’라고 부른다. 쌍둥이 소수는 근접한, 거의 근접한 두 수가 한 쌍을 이루는데, 그 사이엔 항상 둘의 만남을 방해하는 짝수가 있다. 11과 13이라든가 17과 19, 또는 41과 43 같은 수들이 그렇다. (……) 마티아는 자신과 알리체가 그런 사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이 방황하는 두 소수, 가깝지만 실제로 서로 닿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쌍둥이 소수. (173~174쪽)
'결국 그들의 진정한 운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마티아의 불길한 예감처럼 두 주인공은 닿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운명처럼 홀로 남겨지니 가슴 아팠다. 분명 통속은 아닌데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어두운 심연에 도사리고 있는 상처, 누구에게든 불어닥칠 수 있는 고독의 위협떄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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