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탁, 타인의 고통

from Book 2007.01.05 01:07


수잔 손탁의 글은 참 좋다. 화법은 직설적이고 비판은 날카롭다. 지적이면서도 호소력을 갖춘 문장들에선 사회 참여의 열정이 느껴진다. 9.11테러 후에는 ' 우리 모두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고 외치며 대중의 슬픔을 국수적 전쟁에너지로 전환시키는데 혈안이 되있던 미국 사회를 비판했다. 어쩌면 그것이 <타인의 고통>의 주제문이 될 수도 있다.

사진 저널리즘에서 쏟아져나오는 온갖 비참한 사진들, 얼굴이 일그러지고, 팔 다리가 떨어져나가고, 심지어 죽은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있거나 처형 당하는 전쟁 이미지들은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 수잔 손탁은 제목<타인의 고통>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러한 이미지들이 사진 속 사건을 타인의 문제, 나아가 자기가 속하지 않은 외부 세계의 일로 추상화하게 된다고 말한다.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받았던 자극은 분노나 각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사진이 실린 지면과 소통의 맥락 속에 정치적으로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정치적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어느 사회에나 빈곤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기아 사진은 빈곤이 마치 그들 대륙의 특수한 문제인 것처럼 오인하도록 만든다. 테러 공격을 당한 이스라엘 마을의 사진은 이스라엘 인들로 하여금 상대방에 대한 폭력과 공격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용된다.

수잔 손탁은 나아가 그러한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지금 같은 이미지 천국인 사회에서는 그나마 그 역할도 수행하기 힘들다는 현실을 지적한다. 과거의 관점에서 보자면 끔찍하기 그지없는 전쟁영화를 팝콘을 씹어먹으며 태연하게 즐기는 세대에게는 1차 대전 때 세계를 놀라게 했던 죽어가는 병사의 사진이 준 효과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지의 과잉은 이미지 스스로를 소외시킨 셈이 되었다.

사진 저널리즘이 정치성과 함께 다루고 있는 문제는, 정치성이나 사회적인 의미를 제거한 '순수하게 잔인한 이미지들'에 대한 역사다. 수잔 손탁은 전쟁이나 죽음, 인간을 기계화시켰다는 인상을 받게끔 하는 잔인한 그림들은 아주 오랜 시절부터 있어왔다는 예를 들며, '고통'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내세의 구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을 담는 이미지들은 교화의 기능을 했을 것이다. 그런 도록들 역시 미국 정부가 테러 사진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교육의 목적을 위한 이미지들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 말고, 어쩜 사람들은 잔인함, 고통의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어떤 짜릿한 감정을 참지 못하는 기질이 있지 않은가... 수잔 손탁이 예로 들었던 사람은, 능치처참당하고 있는 중국인의 사진을 평생토록 책상에 걸어놓고 살았던 한 성애이론가 조르주 바타이유였다. 그는 이미 팔 다리가 없어지고 양쪽 가슴이 잘려나간 채 여전히 살아서 고통받고 있는 흰눈의 사나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책에 실린 사진을 보고 있으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다. 나는 다시 그 페이지를 볼 때면 손으로 사진을 가리곤 했다. 바타이유는 아마도 그 사진을 보면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극한을 넘어서는 체험을 하고있었던 것은 아닐까.

200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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